Wednesday, April 22, 2009

夏休み


私は今年の夏休みに韓国(かんこく)へ漢文(かんぶん)を勉強にいる予定だ。中国語を話すことができるが漢文は中国語とちがい。そして韓国で使う漢文は中国で使う漢文とちがい。漢文は英語でClassical Chineseだ。でも今韓国で漢文はあまり使わない。私は中国古代の漢文を読めるけど韓国の漢文をちょっとちがいから勉強しなければいけない。これは漢文で書いてあるウィキペディアだ。
私は六月二十二日から七月二十四日まで韓国にいる予定だ。その時、韓国にもいおうと思っているひとがいるか?でも、私はソウルにいないつもりだ。私はソンナム(城南)しへいく。そこはソウルの近くのまちだ。
それから中国へ父と弟にあいにいく予定だ。私たちはいっしょうに黄山(こうざん)に登るつもりだ。黄山は中国の安徽省(あんきしょう:Anhui Province)で一番有名な山だ。その山はとても綺麗で人気がある。



Saturday, April 11, 2009

私の思い出(わたしのおもいで)

春に私の高校のにわでさくらがたくさん開花した。でもこうこう四年生の時の前に毎年きれいな花が注目しなかった。だぶん、あの時に私は春のはなのいみがわからなかった。十六歳ぐらいの少年は落花の悲しさがわかる理由がなかった。
でも四年生のとしにさくらをみてからきもちがわるくならった。あのまえの夏に私は九歳にはじめて中国へかえった。あのなつに私はお爺さんと住んでいた。
お爺さんは学問がすごいひとだ。あの時、お爺さんは八十歳でも毎朝早く起きてから本を読んだり文章を書いたりした。私はお爺さんの静かな生活を変えた。昼ごはんをたべったときお爺さんといつも中国のバイチュウを一杯飲んだ。それから中国語の漢詩についてはなした。
あの時の前に中国の詩を読んだことがあっても、おぼえても漢詩のいみがぜんぜんわからなかった。
中国の詩にさくらがあまりなくても中国の詩人もはるのはなについて話した。漢詩にらっかが人生はみじかいとシンボライズする。毎日お爺さんの生活を見ていてとしを取っひとでも学生のわたしより頑張って勉強したと思いた。私は爺さんに聞いた。お爺さんは年をとった人も習うことがあると説いた。
アメリカへかえった時私のせいかつも変えた。それから頑張って勉強した。わたしのおもいではこうこうの庭にあるさくらをみてはじめてらっかのかなしさがわかった時だった。

Wednesday, April 1, 2009

伊勢の旅行






私は先週にちちやおとうとと日本へ行った。ニューヨークから東京まで十三時間がかかった。でも私たちは東京にと一日だけいた。あそこでなにへもしないた。じょっと残念だった。

東京の皇居(こきょ:Imperial Residence)へ入ってはいけませんが
皇居の庭にはいてもいい。でも、月曜日だったから庭がやすみた!


それから、飛行機とふねと電車で伊勢(いせ)へいった。私たちは伊勢の小さい町、鳥羽(とば)で遊びました。でもちちはまいにち会議(かいぎ)があったからあまり遊びられなかった。

鳥羽のうみがとてもきれなかった。



そして神社(じんじゃ)がたくさんあった。


鳥羽に水族館(すいぞくかん:Aquarium)がある。おもしろいどうぶつがたくさんあった。みんなさん、これをみたことがある?



伊勢の神社の中で伊勢神宮(いせじんぐう)が一番ようめいだ。伊勢神宮は二つのところだ。とても大きかった!






Wednesday, March 11, 2009

역사와 책임

지난 주에 프랑스의 경매 회사에 1860년에 청제국(淸帝國)의여름 행궁(行宮)에서 배앗은 청동기가 두 개 출현했다.  1860년에는 청국이 영국과 프렁스하고 제 이차 아편 전쟁(Second Opium War)중이었는데 함풍(咸豊)황제와 조정은 북경을 수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열하(熱河)로 도망갔다.  영국 군대의 수령 ( James Bruce, 8th Earl of Elgin; Lord Elgin)은 중국이 영국 포로를 고문한 것과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자금성 (紫禁城)을 약탈하고 방화하려고 하다가 그 대신에 여름 행궁을 파괴했다. 

당시는 청국의 행정 기관은 주로 자금성이 아니었고 황가 (皇家)의 주요한 거처가 와 정부 기관이 행궁에 있었다.  그래서 이 행궁의 파괴는 청국 정권에게 작은 손해가 결코 아니었다.  여름행궁의 여러 궁우 (宮宇)중에 제일 유명하던 것은 원명원(圓明園)이었다.  그 것은 건륭(乾隆)시기에 건조한 궁전으로서서양식 건축 양석과 중국과 만주 양석을 혼합하여 서양에 온 예수회 (Society of Jesus)의 건축사들이 설계하였다.  1860에 Lord Elgin의 명령하, 영국 군대가 원명원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황궁의 많은 보물이 그 때부터외국으로 유실되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Lord Elgin 의 아버지(Thomas Bruce, 7th Earl of Elgin and 11th Earl of Kincardine)는 그리스서에 Parthenon의  조각을 배앗던 사람이었다)

프fkd스의 경매 회사에 출현된 청동기는 즉 원명원의 보물이었다.  그 청동기는 하나가 토끼의 머리이고 하나가 쥐의 머리이다.   원래 원명원의 십이지의 두 개이었는데 남은 10 개가 중국의 Poly 박물관에 있다.  중국 정부가 중국에서 유실된 문물의 귀국을  주장하면서 이번 경매를 반대하기 때문데 프랑스 정부에게 이 번 경매를 금지해 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경매회사에 의하면 그 청둥기를 다른 사람에게  법적으로 구매해서 경매를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 아무리 무리하게 얻었지만 Lord Elgin의 죄가 경매 회사의 책임이 아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많은 중국 사람들이 화소원명원(火燒圓明園)이라는 사건은 아직 국치(國恥)로 간주하고 있다.  인터넷의 어느 조사에 의하면 89%이상의 사람은 그 청동기가 중국의 국보이기 때문에  직접 중국으로 귀환해야하고 경매를 반대하는다고 했다.  8%만 그 경매가 합리되니까 금지도 못하다고 했다. 물론 이 조사는 잠석한 사람의 국가를 화긴할수 없기 때문에 중국 사람밖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닌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중국사람은 국치를 중시한 역사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을 충분히 보이는다.

문제의 하나는 기억이다.   기억이 헷갈리면 안 되고 너무 민감하면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서양국가의 박물관에 다른 나라에서 온 문물이 몇 가지만 있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온 것만 아니고 국치라는 것을 갓고 있는 나라 중에 중국은 하나만 이다.  역사를 길게 보면 보물을 약탈한 적이 있는 국가는 19에 서양나라만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죄악이나 포악중에서 문물의 약탈과 궁궐의 방화는 별로 심하지 않았다.  죄를 끝까지 추구(追究)하면 죄가 없는 국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무엇인가?  물론 Lord Elgin이 영제국을 대표해면서 한 일은 영국은 책임이 있었지만 지금도 갖고 있는가?  언제까지 이런 책임을 갖일 수 있는가?  예를들면 중국인은 1966-1976때의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시기에 Tibet에서 한 일의 책임을 떠말지않았다.  원인의 하나는 중국 논담에 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고 다른 원인은 당시 정권을 갖고 있던 사람이  지금의 영도인이지 아니라도 또같은 중국 공산당이다.  

그런데 그 청동기 두 개에 대한 이야기가 twist가 하나 있다.  South China Morning Post 의 기사 "Ransacking History in the Name of Nationalism"에 의하면 그 청동기들을 배앗은 사람은 Lord Elgin이 아니었다.  도광 (道光; 함풍 전의 아버지) 황제의 황후가 이 청동기 12 개를 너무 싫어하더니  숨겨해 시켰다.  그래서 당시 원명원을 파괴하고 나서 중국 약탈자가 배앗은 가능성도 있었다.

Sunday, March 8, 2009

蘇州市の拙政園



これはわたしが2007ねんに中国へ行ったりょこうの時にとったしゃしんだ。中国の蘇州市(そしゅうし)でとった。蘇州市は上海(シャンハイ)のちかくにある町だ。人口(じんこう:population)が233まんぐらいだけと中国の町であまり大きくない。

蘇州市は園林(えんりん:Chinese style gardens)いちばんゆうめいだ。このしゃしんは蘇州市いちばん大きい園林、拙政園(せつせいえん)でとった。拙政園のいみ(Meaning)は拙劣な政治人(せつれつなせいじじん awkward/clumsy official)の園林だ。えいごでGarden of the Humble Administrator)

しゃしんは三月にとってからきのうえははながない。園林の四月は三月よりきれいだ。あの時にはながたくさんある。なつもけいれいけどあたたかい。
しゃしんのうしろのたかい塔(とう:Pagoda)をみる?しかし、あの塔は園林の中じゃない!中国人は借景(しゃっけい)だといい。借景のいみはかりたふうけいだ。おもしろいね?

Saturday, February 28, 2009

無題

夕露逼楓凋,曉光催夢覺。微有積雪,故人行処,足跡仍在,卻是路人身影。總算寒冬,雪光一根香煙,忽紅忽墨,欲托幾分情義。只燈火闌珊中,不見那秀眉薄衫--自是前世追憶。

Wednesday, February 25, 2009

Absolute Destruction

이번학기에 내가 들고 있는 수업 중에 하나는 사료 편찬 입문 (Introduction to Historiography) 이다. 그 수업에 중일마다 한 책을 읽고 수업에 교수와 다른 학생같이 그 작품의 대강, 작자의 출처, 연구 방법 등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번주에는 Isabel V. Hull쓴 책 "완전 파멸:독일 제국 의 군사 문화와 전쟁 관행" Absolute Destruction: Military Culture and the Practices of War in Imperial Germany을 읽는다.

덕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못한 군사 정책, 지나친 군사 행위, 특별히 일반 시민을 학대한 것은, 유럽 역사에서 잘 보고 있는데 이책의 중심점은 덕일의 지나친 관행과 군자적인 극단성은 덕일이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Franco-Prussian War) 부터 실행한 군사 제도와 헌법개역과 식민지 폭동을 억제함의 경험때문인 것이라고 한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덕일의 서남 아프리카의 직민지에 반유목의 도주 민족 흐레로인와 나마인 (Herero and Nama peoples)들은 덕일인 그의 방목지를 찬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덕일 식민 동제를 반대려고 무장 반항을 시작되었다. 독일방은 교섭하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있기는있지만 주류 생각은 빠르게 맹렬하게 이 폭동을 억제하라고 역설했다. 글쓴이 Hull에대해서 당시의 주류 독일 군사 사상은 독일의 군대가 국가의 상징이고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덕일 군대가 익일 수 밖에 없다는 비현실적인 예상이 있던 동시에 성리의 정의가 거의 좁았다. 그 시대의 독일의 군대 성리는 엄천난 무력을 이용해서 원수의 전면적인 파멸이나 무조건 항복을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1870의 정치 개혁의 결과는 독일의 군대가 문민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국회나 외교부의 체제와 떨러져서 군사적인 행동은 정치 목표와 외교 전략과 상관없이 Kaiser의 목허를 받고 나서 실행될 수 이었다. 그런데 Kaiser는 군국주의의 형상을 의지함으로써 정치적인 정통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군대의 행동을 속박하는 이유가 없었다.

1904-1907년의 반폭동 전쟁에서 80만의 흐레로인에 중에서 전쟁의 끝에는 20만명밖에 못 남아있었다. 더 노라운 것은 대부분 사만한 사람이 전투하는 중의 사상인이 아니라 독일 군데이 토주인들을 사마로 뒤쫓한 과정중에 죽인 사람, 사마에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기 때문에 꿂어 죽고 목마름으로 죽은 사람, 전후는 포로 수용소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1904년말에 Waterberg에서 독일 식민부대가 도주인을 초멸(剿滅)하기를 실패되었지만 교전하고나서 토주인이 사마로 도망갔다. 그 때부터 흐레로인의 무장방항이 와해하고 독일에게 교섭을 구하기 시작했다. 교전 전에도 독일 서남아프리카의 총독(總督)은 교섭을 주장해지만 군사 통령의 반대을 받아서 실행못 했다. Waterberg 후에도 군사 통령은 원수의 전면적인 파멸 전에 교섭을 못 한다고 고집하면서 무력을 극도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토주인의 마음에서 무서움을 못 시키고 독일 사람이 약한 놈이라고 생학하겠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교섭을 안 했다. 그리고, 사마의 곤고를 겪을 수 없던 사람들은 독일 야영지로 도망오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죽인 명령도 있었다. 이 전쟁은 2년 동안 계속하고 덕\독일은 6억 Marks까지 써야했다. 전후의 포로 수용소의 사망률은 장소에 따라서 일년에 37-75%까지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아직 못 다 읽었지만 이 책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군사 문화 형성을 분석함으로써 전쟁 시기에 잘못한 일을 이해한 수 있다. 특별이 근대가 외 죄종 정칙목적의 달성을 손해할 일도 하는지 제일 큰 문제이다. 예를들면 일본 군대가 아시아에서 극악무도(極惡無道)하면서도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을 만들려고 하다는 마음으로부터 했다. 원인은 아마 원수의 절저한 파멸이라고 생각한 성리을 추구해야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세계적인 제국을 만드고 있는 과성이 필요한 정치적인 명지와 적절하는 수단과 근본적인 충들이었다.

2005년에 발해되었는데 덜일 제국을 말한 책이었지만 부시의 Iraq전쟁을 기르치면서 지상매괴(指桑罵槐)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Iraq전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고 있냐? 성리를 주구했지만 원수도 모르고 어떻게 익 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