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28, 2009

無題

夕露逼楓凋,曉光催夢覺。微有積雪,故人行処,足跡仍在,卻是路人身影。總算寒冬,雪光一根香煙,忽紅忽墨,欲托幾分情義。只燈火闌珊中,不見那秀眉薄衫--自是前世追憶。

Wednesday, February 25, 2009

Absolute Destruction

이번학기에 내가 들고 있는 수업 중에 하나는 사료 편찬 입문 (Introduction to Historiography) 이다. 그 수업에 중일마다 한 책을 읽고 수업에 교수와 다른 학생같이 그 작품의 대강, 작자의 출처, 연구 방법 등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번주에는 Isabel V. Hull쓴 책 "완전 파멸:독일 제국 의 군사 문화와 전쟁 관행" Absolute Destruction: Military Culture and the Practices of War in Imperial Germany을 읽는다.

덕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못한 군사 정책, 지나친 군사 행위, 특별히 일반 시민을 학대한 것은, 유럽 역사에서 잘 보고 있는데 이책의 중심점은 덕일의 지나친 관행과 군자적인 극단성은 덕일이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Franco-Prussian War) 부터 실행한 군사 제도와 헌법개역과 식민지 폭동을 억제함의 경험때문인 것이라고 한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덕일의 서남 아프리카의 직민지에 반유목의 도주 민족 흐레로인와 나마인 (Herero and Nama peoples)들은 덕일인 그의 방목지를 찬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덕일 식민 동제를 반대려고 무장 반항을 시작되었다. 독일방은 교섭하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있기는있지만 주류 생각은 빠르게 맹렬하게 이 폭동을 억제하라고 역설했다. 글쓴이 Hull에대해서 당시의 주류 독일 군사 사상은 독일의 군대가 국가의 상징이고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덕일 군대가 익일 수 밖에 없다는 비현실적인 예상이 있던 동시에 성리의 정의가 거의 좁았다. 그 시대의 독일의 군대 성리는 엄천난 무력을 이용해서 원수의 전면적인 파멸이나 무조건 항복을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1870의 정치 개혁의 결과는 독일의 군대가 문민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국회나 외교부의 체제와 떨러져서 군사적인 행동은 정치 목표와 외교 전략과 상관없이 Kaiser의 목허를 받고 나서 실행될 수 이었다. 그런데 Kaiser는 군국주의의 형상을 의지함으로써 정치적인 정통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군대의 행동을 속박하는 이유가 없었다.

1904-1907년의 반폭동 전쟁에서 80만의 흐레로인에 중에서 전쟁의 끝에는 20만명밖에 못 남아있었다. 더 노라운 것은 대부분 사만한 사람이 전투하는 중의 사상인이 아니라 독일 군데이 토주인들을 사마로 뒤쫓한 과정중에 죽인 사람, 사마에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기 때문에 꿂어 죽고 목마름으로 죽은 사람, 전후는 포로 수용소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1904년말에 Waterberg에서 독일 식민부대가 도주인을 초멸(剿滅)하기를 실패되었지만 교전하고나서 토주인이 사마로 도망갔다. 그 때부터 흐레로인의 무장방항이 와해하고 독일에게 교섭을 구하기 시작했다. 교전 전에도 독일 서남아프리카의 총독(總督)은 교섭을 주장해지만 군사 통령의 반대을 받아서 실행못 했다. Waterberg 후에도 군사 통령은 원수의 전면적인 파멸 전에 교섭을 못 한다고 고집하면서 무력을 극도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토주인의 마음에서 무서움을 못 시키고 독일 사람이 약한 놈이라고 생학하겠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교섭을 안 했다. 그리고, 사마의 곤고를 겪을 수 없던 사람들은 독일 야영지로 도망오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죽인 명령도 있었다. 이 전쟁은 2년 동안 계속하고 덕\독일은 6억 Marks까지 써야했다. 전후의 포로 수용소의 사망률은 장소에 따라서 일년에 37-75%까지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아직 못 다 읽었지만 이 책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군사 문화 형성을 분석함으로써 전쟁 시기에 잘못한 일을 이해한 수 있다. 특별이 근대가 외 죄종 정칙목적의 달성을 손해할 일도 하는지 제일 큰 문제이다. 예를들면 일본 군대가 아시아에서 극악무도(極惡無道)하면서도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을 만들려고 하다는 마음으로부터 했다. 원인은 아마 원수의 절저한 파멸이라고 생각한 성리을 추구해야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세계적인 제국을 만드고 있는 과성이 필요한 정치적인 명지와 적절하는 수단과 근본적인 충들이었다.

2005년에 발해되었는데 덜일 제국을 말한 책이었지만 부시의 Iraq전쟁을 기르치면서 지상매괴(指桑罵槐)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Iraq전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고 있냐? 성리를 주구했지만 원수도 모르고 어떻게 익 일 수 있을까?

Tuesday, February 24, 2009

北京の旅行へ行きませんか?


今年の三月に私も春休みがあります。春休に旅行へいきましょうか。中国でりょこうへいきたいですか?中国へいったことがありますか?

 

中国のまちでゆうめいなまちがたくさんあります。たとえばシャンハイ(上海 Shanghai)とホンコン(香港Hong Kong)がゆうめいです。でも私は中国の町でいちばんペキン(北京 Beijing)だとおもいです。れきし(history)が好きな人はベキンも好きだとおもいです。

 

ペキンに人がたくさんいます。ニューヨークより多いです。それからとてむにぎやかで、ちゅうみつです(稠密 crowded)。(crowded) 三十年前にペキンでみんなはじてんしゃがあって車はあまりつかいませんでした。でも今ぺきんにじてんしゃもたくさあって車もおおいですからこうつう(交通 traffic) がとてむわるいです。ペキンのこうつうはニューヨークのよりわるいですがぺキンのちかてつははかくてべんりです。それからぺキンで車をつかわないでください。

 

ぺキンのいちばんようめいなところはてんあんもん(天安門 Tiananmen)です。ごぜんあさごはんをたべるからそこへいきます。ちかてつにのって天安門の駅で おります。そこはとでもひろくてゆうめいなビルがあります。いまの天安門のちかくにもうたくとう(毛沢東 Mao Zedong)のびょう(廟 mausoleum/memorial hall)と中国のこうてい(皇帝 emperor)のうちはあります。中国のこうていのうちはしきんじょう(紫禁城 Forbidden City)です。そこのなかのビルはふるくて大きいです。でもいま中国はこうていがいませんからしきんじょうはびじゅつかんになっています。そこのなかにきれいな絵(え)とアンティーク(antique)があります。

 

ペキンにおいしいレストランがおおきいです。ペキンダックはゆうめいでおいしいですからペキンダックのレストランでたべてもいいです。しょくじするからどうぶつえんへいったりぺキンのオリンピックのビルをみたりすることができます。どうぶつえんでパンダをみることができます。パンダがかわいいですがパンダにたべものをあげてはいけません。人をかじり(to bite)ますよ!

 

私はペキンにともだちがいますからともだちとすんでもいいです。でもはやくひこうきのきっぷをかってください!たかくなりますよ!そして三月のペキンはちょっとさむいですから冬のふくをもっていってください。



天安門です。

Thursday, February 19, 2009

六郎日記

子時深夜 孤燈暗明 幾卷舊籍在手 一覽無味 空想古人 若此情景 必寄情於翰墨 投愁緒以詞藻
夜半不眠 亦南朝逸話 汴州夢談 如今重蹈覆轍 毫無趣味 夜雖靜而無所思 情有餘安得知音之人。
那些燈火闌珊 寒蟬淒切 海棠依舊句 反復思索 空有妙珠玉語而無一字可通於目前 非廢古人之文詣 唯怨無彩筆可失 轉念浮生 一度幾時光寒 且訪古人 往留日思於後世

東國忠武公死于疆場 留難中日記而名垂青史 海平尹公佐翁 通四國文字 留日記以諸文 哀哉行背心志 痛悔一生 空死于練綢 東洋僧 吉田兼好 著徒然草一書 將白宣塗與牆壁 不為一事 卻傳達至今

無報國精忠之宏志 不求忠武之烈名 無通今博古之才俊
不求尹公之聞達 無棄俗樂道之懿範 但求兼好之明慧

此日記無別意 草文自娛 亦不虧對燭瑩

名為六郎 因親舊嘗如此稱之 故以此為號

Wednesday, February 18, 2009

연극, 서사시, 서정시: 서양와 동양 문학사

서양 문학사에서 전통적으로 위치가 제일 높은  문학 작품 종류는 19세기까지 서사시와 연극이었다.  예를들면 고대 그리스에 호메로스가 쓴 Iliad및Odyssey와 로마 사시인 Virgil의 Aneid가 서사의 제일 중요한 작품이고 소포클레스와 마리스토파네스는 연극의 시초(始初)이었다.  문예 부흥이후에 유럽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와 연극을 유럽 문명의 원천으로 보면서 당대는 연극이 문화와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봤다.  그 시대 의 유럽 사람들은 외부의 문화를 접촉 했을때 그 다른 문화 전통에서도 연극 전통을 찾고 그 연극 전통의 존재나 발달에 근거함으로써 그 나라, 예를들면 남아시아의 인도나 동양의 일본이나 중국등 의 문화 전통들을, 즉  나라, 평가도 하고 무시도 했다.

중국을 볼때 고대 유럽과 문학 조예가  같은 연극 전통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대 (元代) 의 연극 조씨고아 (趙氏孤兒)는 17세기에 프란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유럽의 문인들은 그 연극을 개작해서 새롭게 만든 몇 작품도 있었다.  Voltaire의 L'Orphelin de Chine는 이런 중국식 서양 연극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연극을 아주 중시하기는 했지만 중국 지식인들은 20세기까지도 연극을 계속 무시했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나 귀족들은 아무리 연극이 관심이 있어도 연극을 장사꾼의 나증ㄴ 수준의 노리기고 저속 오락이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오락이지 "문 (文)"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연극을 사랑하면서도 20세기까지 결코 경멸하기도했다

문학이라는 단어는 사실은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외래어이었다.  동양에서 원래 문학이라는 말이 없고 그 대신에 "문장"이라는 개념이었다.  문장이라는 단어의 역사가 복잡하고 길다.  위나라 의 황제 조비가(曺丕, 즉 삼국지의 유명한 조조의 아들) 문장경국지대업불후지성사"文章經國之大業不朽之盛事이린 말이 있었다.  조비에 대해서 문장은 국가를 경영하고 썪지 않은 큰 성사(盛事)라고 했다.  조비에 있어 문장은 우리 현대인이 말하는 문화, 교육과 문학을 포함한 개념이었다.  문장의 역활은 정치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고 역사의  연속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제대로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고 즉 시(詩)라고 했다.  동양은 서양과 다라서, 제일 중요한 문학 종류가 연극도 아니었고 서사시도 아니었다.   서정시이었다. 

서양의 고전 서사시를 보면 꼭 줄거리가 있고 인물도 있다.  작품을 읽을 때 한상 인물의 변화를 중시하고 아니면, 꼭 인물의 내심을 본다.  그리고 서사시에 보통 이야기하는 나레이터가 주인공이 아니다.  서정시인 경우에도  읽을 때 보통 시의 말하고 있는 사람과 시인이 일차 핮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런데, 당나라 의 한시, 조선시대의 시조를 읽을때 시에서 나온 느낌이나 생각이 직접 작자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이해한다.  예를들면 
"백골이 진퇴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
라는 말이 정몽주의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Wednesday, February 11, 2009

私の家族

私の家族は両親と弟がいます。家はニューヨークですが四年の前に家族がカリフォルニア州へいきます。私は今一人でニューヨークに住んでいます。一年に二回家族に会います。一人ですが ニューヨークの生活は面白って友達もたくさんいますからあまりさびいしくありません。そして今猫がありますから一人じゃありません。

Monday, February 9, 2009

CYI

내가 대학교 삼학년때 고등학교 후배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그 후배는 나이가 나보다 세살 아래였다.

영어를 가르치고 싶으냐고 물어봤다. 그는 당시 고등학생이었지만 아주 큰 계획이 있었다. Chinatown에서 영어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학생들에게서 학비를 한푼도 받지 않을거라고 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학비도 없고 완전히 공짜로 어떻게 영어 수업을 하고 또 선생들은 어떻게 할까 라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서 학비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프로그램을 운영할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봉사로 할 것이라고 했다. 

그 후배는 내가 처음 만났을때부터 이상주의자이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녔을때, 사학년까지 지역 봉사를 사년 동안 한 시간도 안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사학년때까지 봉사  80시간을 채우지 못 하면 졸업을 못 하기 때문에 정말 걱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후배에게 나를 도와 달라고 해서 그가 지역 봉사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그 후배에게 도움을 청하니까 그후배는 내게 지역봉사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고 그 후배의 덕분에 나는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교 삼학년때의 나는 아주 전형적인 게으른 대학생이었다. 숙제와 전자오락과 친구와 술밖에 모르는 학생이었게에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배가 도와 달라고 했고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교 삼학년때 시월부터 사월까지 일요일마다 일찍 일어나서 Chinatown에서 중국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갔다.


이 프로그램은 Chinatown Literacy Project이라고 한다. 이민자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뉴욕에 많고 특별한 것이 아니었지만 이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다른 점은 나하고 다른 선생하나를 제외한 봉사자들이 다 고등학교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고등학생이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 었다.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은 다 어른인데도 부끄러워하지않고 수업이 끝나고  고등학교 학생과 같이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서 영어 회화를 연습한다. 학기마다 어른 학생이 오십명이나 등록하고 고등학생 봉선자들이 이십명정도 참석한다.


작년부터 나는 영어 가르치는 것을 그만 두었지만 이 Chinatown Literacy Project 의 후원 단체, Chinatown Youth Initiatives(화부청년계몽계획 華埠靑年啓蒙計劃)이란 비영리 단체의 이사회에 들어갔다. 이 비영리 단체의 주된 임무는 지역 봉사나 교육을 통해서 젊은 사람들의 지도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경제가 불경기때문에 자금 확보가 정말 어렵다. 우리는 8월까지 40만불이나 모아야한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Thursday, February 5, 2009

始めまして

始めまして、私は浜田先生の日本語クラスの学生です。私の名前はスーシャンワン(王思翔)です。英語ででSixiang Wangです。でも、英語で読み方は難しいですから友達はsixで呼びます。

私はコロンビア大学の大学院生です。韓国の歴史を研究します。そして中国の文学と歴史を勉強します。それから中国語が分かって韓国語も分かります。でも韓国語があまり上手じゃありません。

日本語の勉強はとてもおもしろいですが難しいです。



大学院生 だいがくいんせい 
韓国 かんこく
読み方 よみかた
難しい むずかしい
歴史 れきし history
研究 けんきゅう
文学 ぶんかく literature
勉強 べんき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