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11, 2009

역사와 책임

지난 주에 프랑스의 경매 회사에 1860년에 청제국(淸帝國)의여름 행궁(行宮)에서 배앗은 청동기가 두 개 출현했다.  1860년에는 청국이 영국과 프렁스하고 제 이차 아편 전쟁(Second Opium War)중이었는데 함풍(咸豊)황제와 조정은 북경을 수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열하(熱河)로 도망갔다.  영국 군대의 수령 ( James Bruce, 8th Earl of Elgin; Lord Elgin)은 중국이 영국 포로를 고문한 것과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자금성 (紫禁城)을 약탈하고 방화하려고 하다가 그 대신에 여름 행궁을 파괴했다. 

당시는 청국의 행정 기관은 주로 자금성이 아니었고 황가 (皇家)의 주요한 거처가 와 정부 기관이 행궁에 있었다.  그래서 이 행궁의 파괴는 청국 정권에게 작은 손해가 결코 아니었다.  여름행궁의 여러 궁우 (宮宇)중에 제일 유명하던 것은 원명원(圓明園)이었다.  그 것은 건륭(乾隆)시기에 건조한 궁전으로서서양식 건축 양석과 중국과 만주 양석을 혼합하여 서양에 온 예수회 (Society of Jesus)의 건축사들이 설계하였다.  1860에 Lord Elgin의 명령하, 영국 군대가 원명원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황궁의 많은 보물이 그 때부터외국으로 유실되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Lord Elgin 의 아버지(Thomas Bruce, 7th Earl of Elgin and 11th Earl of Kincardine)는 그리스서에 Parthenon의  조각을 배앗던 사람이었다)

프fkd스의 경매 회사에 출현된 청동기는 즉 원명원의 보물이었다.  그 청동기는 하나가 토끼의 머리이고 하나가 쥐의 머리이다.   원래 원명원의 십이지의 두 개이었는데 남은 10 개가 중국의 Poly 박물관에 있다.  중국 정부가 중국에서 유실된 문물의 귀국을  주장하면서 이번 경매를 반대하기 때문데 프랑스 정부에게 이 번 경매를 금지해 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경매회사에 의하면 그 청둥기를 다른 사람에게  법적으로 구매해서 경매를 금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에 아무리 무리하게 얻었지만 Lord Elgin의 죄가 경매 회사의 책임이 아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많은 중국 사람들이 화소원명원(火燒圓明園)이라는 사건은 아직 국치(國恥)로 간주하고 있다.  인터넷의 어느 조사에 의하면 89%이상의 사람은 그 청동기가 중국의 국보이기 때문에  직접 중국으로 귀환해야하고 경매를 반대하는다고 했다.  8%만 그 경매가 합리되니까 금지도 못하다고 했다. 물론 이 조사는 잠석한 사람의 국가를 화긴할수 없기 때문에 중국 사람밖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닌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중국사람은 국치를 중시한 역사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을 충분히 보이는다.

문제의 하나는 기억이다.   기억이 헷갈리면 안 되고 너무 민감하면 문제도 생길 수 있다.  서양국가의 박물관에 다른 나라에서 온 문물이 몇 가지만 있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온 것만 아니고 국치라는 것을 갓고 있는 나라 중에 중국은 하나만 이다.  역사를 길게 보면 보물을 약탈한 적이 있는 국가는 19에 서양나라만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죄악이나 포악중에서 문물의 약탈과 궁궐의 방화는 별로 심하지 않았다.  죄를 끝까지 추구(追究)하면 죄가 없는 국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개인의 관계가 무엇인가?  물론 Lord Elgin이 영제국을 대표해면서 한 일은 영국은 책임이 있었지만 지금도 갖고 있는가?  언제까지 이런 책임을 갖일 수 있는가?  예를들면 중국인은 1966-1976때의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시기에 Tibet에서 한 일의 책임을 떠말지않았다.  원인의 하나는 중국 논담에 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고 다른 원인은 당시 정권을 갖고 있던 사람이  지금의 영도인이지 아니라도 또같은 중국 공산당이다.  

그런데 그 청동기 두 개에 대한 이야기가 twist가 하나 있다.  South China Morning Post 의 기사 "Ransacking History in the Name of Nationalism"에 의하면 그 청동기들을 배앗은 사람은 Lord Elgin이 아니었다.  도광 (道光; 함풍 전의 아버지) 황제의 황후가 이 청동기 12 개를 너무 싫어하더니  숨겨해 시켰다.  그래서 당시 원명원을 파괴하고 나서 중국 약탈자가 배앗은 가능성도 있었다.

Sunday, March 8, 2009

蘇州市の拙政園



これはわたしが2007ねんに中国へ行ったりょこうの時にとったしゃしんだ。中国の蘇州市(そしゅうし)でとった。蘇州市は上海(シャンハイ)のちかくにある町だ。人口(じんこう:population)が233まんぐらいだけと中国の町であまり大きくない。

蘇州市は園林(えんりん:Chinese style gardens)いちばんゆうめいだ。このしゃしんは蘇州市いちばん大きい園林、拙政園(せつせいえん)でとった。拙政園のいみ(Meaning)は拙劣な政治人(せつれつなせいじじん awkward/clumsy official)の園林だ。えいごでGarden of the Humble Administrator)

しゃしんは三月にとってからきのうえははながない。園林の四月は三月よりきれいだ。あの時にはながたくさんある。なつもけいれいけどあたたかい。
しゃしんのうしろのたかい塔(とう:Pagoda)をみる?しかし、あの塔は園林の中じゃない!中国人は借景(しゃっけい)だといい。借景のいみはかりたふうけいだ。おもしろいね?

Saturday, February 28, 2009

無題

夕露逼楓凋,曉光催夢覺。微有積雪,故人行処,足跡仍在,卻是路人身影。總算寒冬,雪光一根香煙,忽紅忽墨,欲托幾分情義。只燈火闌珊中,不見那秀眉薄衫--自是前世追憶。

Wednesday, February 25, 2009

Absolute Destruction

이번학기에 내가 들고 있는 수업 중에 하나는 사료 편찬 입문 (Introduction to Historiography) 이다. 그 수업에 중일마다 한 책을 읽고 수업에 교수와 다른 학생같이 그 작품의 대강, 작자의 출처, 연구 방법 등 문제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번주에는 Isabel V. Hull쓴 책 "완전 파멸:독일 제국 의 군사 문화와 전쟁 관행" Absolute Destruction: Military Culture and the Practices of War in Imperial Germany을 읽는다.

덕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못한 군사 정책, 지나친 군사 행위, 특별히 일반 시민을 학대한 것은, 유럽 역사에서 잘 보고 있는데 이책의 중심점은 덕일의 지나친 관행과 군자적인 극단성은 덕일이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Franco-Prussian War) 부터 실행한 군사 제도와 헌법개역과 식민지 폭동을 억제함의 경험때문인 것이라고 한다.

1904년부터 1907년까지 덕일의 서남 아프리카의 직민지에 반유목의 도주 민족 흐레로인와 나마인 (Herero and Nama peoples)들은 덕일인 그의 방목지를 찬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덕일 식민 동제를 반대려고 무장 반항을 시작되었다. 독일방은 교섭하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있기는있지만 주류 생각은 빠르게 맹렬하게 이 폭동을 억제하라고 역설했다. 글쓴이 Hull에대해서 당시의 주류 독일 군사 사상은 독일의 군대가 국가의 상징이고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덕일 군대가 익일 수 밖에 없다는 비현실적인 예상이 있던 동시에 성리의 정의가 거의 좁았다. 그 시대의 독일의 군대 성리는 엄천난 무력을 이용해서 원수의 전면적인 파멸이나 무조건 항복을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1870의 정치 개혁의 결과는 독일의 군대가 문민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국회나 외교부의 체제와 떨러져서 군사적인 행동은 정치 목표와 외교 전략과 상관없이 Kaiser의 목허를 받고 나서 실행될 수 이었다. 그런데 Kaiser는 군국주의의 형상을 의지함으로써 정치적인 정통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군대의 행동을 속박하는 이유가 없었다.

1904-1907년의 반폭동 전쟁에서 80만의 흐레로인에 중에서 전쟁의 끝에는 20만명밖에 못 남아있었다. 더 노라운 것은 대부분 사만한 사람이 전투하는 중의 사상인이 아니라 독일 군데이 토주인들을 사마로 뒤쫓한 과정중에 죽인 사람, 사마에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기 때문에 꿂어 죽고 목마름으로 죽은 사람, 전후는 포로 수용소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1904년말에 Waterberg에서 독일 식민부대가 도주인을 초멸(剿滅)하기를 실패되었지만 교전하고나서 토주인이 사마로 도망갔다. 그 때부터 흐레로인의 무장방항이 와해하고 독일에게 교섭을 구하기 시작했다. 교전 전에도 독일 서남아프리카의 총독(總督)은 교섭을 주장해지만 군사 통령의 반대을 받아서 실행못 했다. Waterberg 후에도 군사 통령은 원수의 전면적인 파멸 전에 교섭을 못 한다고 고집하면서 무력을 극도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토주인의 마음에서 무서움을 못 시키고 독일 사람이 약한 놈이라고 생학하겠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교섭을 안 했다. 그리고, 사마의 곤고를 겪을 수 없던 사람들은 독일 야영지로 도망오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죽인 명령도 있었다. 이 전쟁은 2년 동안 계속하고 덕\독일은 6억 Marks까지 써야했다. 전후의 포로 수용소의 사망률은 장소에 따라서 일년에 37-75%까지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아직 못 다 읽었지만 이 책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군사 문화 형성을 분석함으로써 전쟁 시기에 잘못한 일을 이해한 수 있다. 특별이 근대가 외 죄종 정칙목적의 달성을 손해할 일도 하는지 제일 큰 문제이다. 예를들면 일본 군대가 아시아에서 극악무도(極惡無道)하면서도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을 만들려고 하다는 마음으로부터 했다. 원인은 아마 원수의 절저한 파멸이라고 생각한 성리을 추구해야하는 일본 군국주의와 세계적인 제국을 만드고 있는 과성이 필요한 정치적인 명지와 적절하는 수단과 근본적인 충들이었다.

2005년에 발해되었는데 덜일 제국을 말한 책이었지만 부시의 Iraq전쟁을 기르치면서 지상매괴(指桑罵槐)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Iraq전쟁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고 있냐? 성리를 주구했지만 원수도 모르고 어떻게 익 일 수 있을까?

Tuesday, February 24, 2009

北京の旅行へ行きませんか?


今年の三月に私も春休みがあります。春休に旅行へいきましょうか。中国でりょこうへいきたいですか?中国へいったことがありますか?

 

中国のまちでゆうめいなまちがたくさんあります。たとえばシャンハイ(上海 Shanghai)とホンコン(香港Hong Kong)がゆうめいです。でも私は中国の町でいちばんペキン(北京 Beijing)だとおもいです。れきし(history)が好きな人はベキンも好きだとおもいです。

 

ペキンに人がたくさんいます。ニューヨークより多いです。それからとてむにぎやかで、ちゅうみつです(稠密 crowded)。(crowded) 三十年前にペキンでみんなはじてんしゃがあって車はあまりつかいませんでした。でも今ぺきんにじてんしゃもたくさあって車もおおいですからこうつう(交通 traffic) がとてむわるいです。ペキンのこうつうはニューヨークのよりわるいですがぺキンのちかてつははかくてべんりです。それからぺキンで車をつかわないでください。

 

ぺキンのいちばんようめいなところはてんあんもん(天安門 Tiananmen)です。ごぜんあさごはんをたべるからそこへいきます。ちかてつにのって天安門の駅で おります。そこはとでもひろくてゆうめいなビルがあります。いまの天安門のちかくにもうたくとう(毛沢東 Mao Zedong)のびょう(廟 mausoleum/memorial hall)と中国のこうてい(皇帝 emperor)のうちはあります。中国のこうていのうちはしきんじょう(紫禁城 Forbidden City)です。そこのなかのビルはふるくて大きいです。でもいま中国はこうていがいませんからしきんじょうはびじゅつかんになっています。そこのなかにきれいな絵(え)とアンティーク(antique)があります。

 

ペキンにおいしいレストランがおおきいです。ペキンダックはゆうめいでおいしいですからペキンダックのレストランでたべてもいいです。しょくじするからどうぶつえんへいったりぺキンのオリンピックのビルをみたりすることができます。どうぶつえんでパンダをみることができます。パンダがかわいいですがパンダにたべものをあげてはいけません。人をかじり(to bite)ますよ!

 

私はペキンにともだちがいますからともだちとすんでもいいです。でもはやくひこうきのきっぷをかってください!たかくなりますよ!そして三月のペキンはちょっとさむいですから冬のふくをもっていってください。



天安門です。

Thursday, February 19, 2009

六郎日記

子時深夜 孤燈暗明 幾卷舊籍在手 一覽無味 空想古人 若此情景 必寄情於翰墨 投愁緒以詞藻
夜半不眠 亦南朝逸話 汴州夢談 如今重蹈覆轍 毫無趣味 夜雖靜而無所思 情有餘安得知音之人。
那些燈火闌珊 寒蟬淒切 海棠依舊句 反復思索 空有妙珠玉語而無一字可通於目前 非廢古人之文詣 唯怨無彩筆可失 轉念浮生 一度幾時光寒 且訪古人 往留日思於後世

東國忠武公死于疆場 留難中日記而名垂青史 海平尹公佐翁 通四國文字 留日記以諸文 哀哉行背心志 痛悔一生 空死于練綢 東洋僧 吉田兼好 著徒然草一書 將白宣塗與牆壁 不為一事 卻傳達至今

無報國精忠之宏志 不求忠武之烈名 無通今博古之才俊
不求尹公之聞達 無棄俗樂道之懿範 但求兼好之明慧

此日記無別意 草文自娛 亦不虧對燭瑩

名為六郎 因親舊嘗如此稱之 故以此為號

Wednesday, February 18, 2009

연극, 서사시, 서정시: 서양와 동양 문학사

서양 문학사에서 전통적으로 위치가 제일 높은  문학 작품 종류는 19세기까지 서사시와 연극이었다.  예를들면 고대 그리스에 호메로스가 쓴 Iliad및Odyssey와 로마 사시인 Virgil의 Aneid가 서사의 제일 중요한 작품이고 소포클레스와 마리스토파네스는 연극의 시초(始初)이었다.  문예 부흥이후에 유럽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와 연극을 유럽 문명의 원천으로 보면서 당대는 연극이 문화와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봤다.  그 시대 의 유럽 사람들은 외부의 문화를 접촉 했을때 그 다른 문화 전통에서도 연극 전통을 찾고 그 연극 전통의 존재나 발달에 근거함으로써 그 나라, 예를들면 남아시아의 인도나 동양의 일본이나 중국등 의 문화 전통들을, 즉  나라, 평가도 하고 무시도 했다.

중국을 볼때 고대 유럽과 문학 조예가  같은 연극 전통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원대 (元代) 의 연극 조씨고아 (趙氏孤兒)는 17세기에 프란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유럽의 문인들은 그 연극을 개작해서 새롭게 만든 몇 작품도 있었다.  Voltaire의 L'Orphelin de Chine는 이런 중국식 서양 연극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연극을 아주 중시하기는 했지만 중국 지식인들은 20세기까지도 연극을 계속 무시했다.  명조와 청조의 황제나 귀족들은 아무리 연극이 관심이 있어도 연극을 장사꾼의 나증ㄴ 수준의 노리기고 저속 오락이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오락이지 "문 (文)"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연극을 사랑하면서도 20세기까지 결코 경멸하기도했다

문학이라는 단어는 사실은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외래어이었다.  동양에서 원래 문학이라는 말이 없고 그 대신에 "문장"이라는 개념이었다.  문장이라는 단어의 역사가 복잡하고 길다.  위나라 의 황제 조비가(曺丕, 즉 삼국지의 유명한 조조의 아들) 문장경국지대업불후지성사"文章經國之大業不朽之盛事이린 말이 있었다.  조비에 대해서 문장은 국가를 경영하고 썪지 않은 큰 성사(盛事)라고 했다.  조비에 있어 문장은 우리 현대인이 말하는 문화, 교육과 문학을 포함한 개념이었다.  문장의 역활은 정치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고 역사의  연속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제대로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고 즉 시(詩)라고 했다.  동양은 서양과 다라서, 제일 중요한 문학 종류가 연극도 아니었고 서사시도 아니었다.   서정시이었다. 

서양의 고전 서사시를 보면 꼭 줄거리가 있고 인물도 있다.  작품을 읽을 때 한상 인물의 변화를 중시하고 아니면, 꼭 인물의 내심을 본다.  그리고 서사시에 보통 이야기하는 나레이터가 주인공이 아니다.  서정시인 경우에도  읽을 때 보통 시의 말하고 있는 사람과 시인이 일차 핮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런데, 당나라 의 한시, 조선시대의 시조를 읽을때 시에서 나온 느낌이나 생각이 직접 작자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이해한다.  예를들면 
"백골이 진퇴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줄이 있으랴"
라는 말이 정몽주의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는가?